조선에서 본 일본의 력사(8)

1. 우회로(迂回路)로서의 ≪보호국≫

1904년 러일전쟁의 도발과 일본침략군의 조선강점하에서 강요된 ≪한일의정서≫에 의하여 조선은 실질적으로 식민지로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의 강제조인에 의하여 조선은 ≪보호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16세기이래 서유럽제국사이에서 폭력적인 식민지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19세기말에 이르러 세계는 거의 유미열강에 의하여 분할되었다. 열강의 지배에 대하여 식민지,반식민지제민족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아프리카의 보어전쟁이나 중국의 의화단전쟁, 조선에서의 갑오농민전쟁 등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이 시기의 침략과 식민지지배가 이전 시기와 다른 것은 우선 자본주의열강간에서 협의를 통하여 식민지쟁탈전의 이해를 조절(베를린 서아프리카회의)하며 또한 피압박민족들의 반식민지투쟁을 폭력적인 억압과 함께 교활한 방식으로 통치하려고 한 것이었다.

일본에 의한 ≪한국보호국≫화는 식민지지배의 세계사에서 19세기 이래의 폭력적인 식민지지배의 최후의 시대, 동시에 식민지지배의 새로운 단계-일방에서는 ≪보호국≫, ≪병합≫, ≪자치령≫이라는 ≪세련≫된 식민지지배에로의 세계사적인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903년 12월 30일 일본정부내각은 대러개전 경우에 취하여야 할 대한대책을 결정하였다(≪만일 러국과의 평화가 결렬한 경우 우리 나라(일본국)가 청한량국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방침에 관한 건≫). 여기서는 ≪실력(군사력)으로 한국을 우리 권세하에≫ 두어야 하고 그 경우 ≪명의(名義)≫가 옳을 것을 선택하는 것이 ≪특책≫이라고 하였다. 즉 군사적수단과 병행하여 명의가 옳은 방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명의≫가 옳은 수단이란 국제법에 적응한 수단이었다. 각의결정에 의하여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무성이 정력적으로 연구를 추진하여 명의의 옳은 수단으로서 ≪보호국≫을 선택하였다. 당시 외무성의 보호국조사의 책임자였던 국제법학자 다찌 사꾸따로(立作太郞)는 외교권은 국가의 독립의 요건이니 일한조약에 의하여 한국은 독립국이 아니게 되고 국가의 ≪소멸≫까지의 과도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해설하고 있다. ≪보호국≫은 바로 병합에로의 과도적 단계=우회로였다.

초대통감으로 된 이또 히로부미는 보호국하에서의 ≪일본의 정책은 한국을 부강하게 하고 독립자위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한이 제휴하는데 있다≫고 하여 이른바 ≪자치육성≫정책을 표방하였다. ≪자치육성≫정책의 내용은 ①사법제도의 정비 ②은행금융기관의 설치 ③식산흥업 ④교육진흥이다. 그런데 최근 일한의 연구자들속에서 이러한 이또의 ≪통감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이또 히로부미와 한국통치-초대통감정치를 둘러싼 백년 째의 검증≫2009년). 이들은 이러한 이또를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에 사살함으로써 원로 야마가따 아리모또(山縣有朋)와 데라우찌 마사따께(寺內正毅) 육군대신이 주도하여 병합을 서둘렀으며 병합 후의 조선식민지통치의 구상도 이또의 구상과는 다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또의 ≪자치육성≫정책의 실체는 조선을 일본에 예속시키는 정책이었다. ①은 조선을 일본의 배타적 영역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②는 화폐정리사업을 시발로 하여 제1은행부터 한국은행에로 이어진 중앙은행의 설립, 지방금융조합의 설립 등으로 대표되지만 이것은 일본의 경제권에 조선반도를 인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③은 누구를 의한 식산흥업인가가 문제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수행하는 것도 은혜를 받는 것도 그 주체는 일본인이었다. ④도 조선의 근대화를 표방하면서도 조선의 민족교육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1908년 8월에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애국계몽운동가 등이 설립한 수많은 사립학교를 강제폐쇄하였다. 또한 관공립학교에서는 일본인이 운영의 중심이 되고 일본어교육을 강제하였다. 이또의 이러한 ≪자치육성≫정책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의 저항에 부딪쳤으며 그의 ≪통감≫재임시기에 반일의병운동이 식민지전쟁의 양상을 띠고 앙양되었다. 이또는 ≪자치≫의 미명 하에 조선인을 회유하려는 자기의 구상이 달콤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04년 4월 10일 이또는 일본에서 가쯔라 타로(桂太郞) 수상과 고무라 즈따로(小村壽太郞)외상과의 회의에서 ≪한국병합≫을 토의합의하였다. 6월14일 이또는 통감을 사임하고 7월 6일에는 ≪한국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정대강≫을 각의결정하였다. 이또가 ≪병합≫의 뜻을 굳게 하고 있었던 이상 안중근의 의거가 ≪한국병합≫을 앞당겼다고 하는 판단은 결코 할 수 없다.

2.일제의 조선식민지지배의 시기구분

▲ 함경북도의 헌병경찰 [사진 : 필자 제공]

1910년 8월 ≪한국병합조약≫에 의하여 명목상만 남아있었던 대한제국이 폐절되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36년간의 조선식민지지배의 역사는 통치정책의 추이에 따라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10년대 ≪무단통치≫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식민지지배의 기초를 구축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총독무관전임제, 헌병경찰제 등 식민지억압기구를 정비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및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 토지소유권과 식민지지주제를 확립하였으며 회사령을 발포하여 조선인 자본을 억제하여 식민지경제에로 재편하였다. 사회문화적으로는 ≪동화주의≫를 조선통치의 기본이념으로 내세우고 식민지교육제도를 실시하고 민족문화의 말살을 노렸다. 병합 직후 데라우찌총독은 ≪예로부터 일본제국과 한토(韓土)는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하며 조선인을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한국병합의 본지(本旨)≫이다고 하였으며 일본과 조선은 ≪동종동문(同種同文)이고 풍속풍교도 큰 차이는 없고 서로 융합동화하여야 한다≫고 연설하였으며 하라 다까시(原敬)수상도 ≪조선통치의 원칙은 내지(內地)인민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주의, 방향에서 한다는 것을 근본정책으로 규정≫하였다.

제2기는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이고 식민지적수탈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정치적으로는 헌병과 보통경찰을 분리하였으나 헌병대 수와 경찰 수는 증대하였고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는 등 폭력적 탄압을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미곡을 대량적으로 수탈하였으며 회사령을 철폐하여 일본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사회문화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일정한 범위 내에서 언론출판활동을 허용함으로써 민족개량주의가 대두하고 민족운동을 분열하도록 하였다.

제3기는 1930년대의 파쑈정치기이고 1937년의 중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전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조선을 대륙침략의 인적・물적자원을 대량수탈하기 위한 ≪대륙병참기지≫로 위치지었다. 정치적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만선일체(滿鮮一體)≫를 내걸고 파쑈억압을 극한까지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조선 동북지방을 대륙침략을 위한 군수공업지구로 만들며 전 조선에서 인적 및 물적 자원을 깡그리 수탈하였다. 사회문화적으로는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행하였다. 교육에서 조선어, 조선사과목을 철폐하고 일본어의 상용을 강제하였다. 생활에서는 ≪황국신민의 선서≫,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수많은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 박정희가 혈서로 지원서를 제출한것을 ≪미담≫으로 보도한 기사(만주신문1933년 3월 31일부) [사진 : 필자 제공]

3.전쟁에로의 동원

1) 병력동원

일제는 전시체제하에서 식민지조선에서 각종 형태의 인적동원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침략전쟁의 대포밥으로 병력동원을 강행하였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고 지원자의 선발에 의한 조선인병사가 생겨난다. 피지배민족에게 무기를 가지도록 하는 것은 ≪황민화≫의 성과가 있은 후라야 하지만 지원병령은 직접적인 병력의 확보라기보다 황민화교육의 일환으로서의 의미가 컸고 선발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였다. 군함에 조선인을 태우는데 신중한 자세를 취하던 해군은 43년에 겨우 지원병제의 실시를 결단하였다. 육해군의 지원병과 학도병의 인원수는 합계 2만 3681명이라는 수자가 남아있다.

전쟁국면이 악화되고 전력보충이 긴요한 과제로 되자 드디어 44년에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여 대량적으로 징집하였다. 일본패전 후의 후생성 제2복원국 ≪재일조선인개황≫(1958년)은 징병수를 육해군 합쳐서 20만 9279명이라는 숫자를 올리고 있다.

병사이외에 군요원(軍要員)으로서 동원되었다. 그 신분은 군에 직접 고용되는 군속(軍屬)의 형태로 조선 내의 군대에 배속된 사람들 이외에 일본, 만주, 중국본토, 남방에 보냈다. 군속중에 사실상의 병력으로 활용한 경우도 있고 남방에 간 사람들은 비행장, 도로건설 등에 사역된 이외에 유미포로들의 감시원으로 배속되었는데 이것이 전후의 전범재판에서 BC급전범으로서 재판받는 원인이 되었다. 연합국의 의한 재판에서 23명의 조선인이 사형, 125명이 유기형으로 되였으나 거의 포로감시원으로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전사자, 전상자나 유가족에 대한 보상문제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군인・군속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후생성 원호국의 자료에 의하면 2만 2182명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군인・군속의 총수를 24만 명으로 하고 있으니 제2복원국 자료의 38만여 명에 비교하여 동원수 전체를 적게 하고있기 때문에 군속의 사망자 등 빠지고 있는 수가 많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 노무동원

병력으로서의 동원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서의 대규모의 동원이 계획되고 조선내에서의 동원은 물론 일본 등지에로의 집단적인 노무동원이 강행되었다. 일본내지에서는 젊은 층이 전쟁터에 가서 노동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식민지조선에서 동원되었던 것이다. 국민동원계획에 따라 1939년부터 모집형식으로 시작되였다. 42년부터는 관알선방식으로, 44년부터는 징용방식으로 동원이 실시되었다. 이른바 강제연행이다. 그 태반이 탄광이나 광산, 토목공사장에 배속되고 가혹하고 강제적인 노동에 종사하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가라후또(樺太), 남양제도에도 강제연행되었다. 각 년도의 노무동원수에 대한 여러 종류의 통계자료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통계는 아래와 같다.

가혹한 노동에 의하여 사망하거나 부상한 데 대한 보상문제, 임금의 미지불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아있다. 또한 히로시마, 나가사끼의 군수공장에 동원된 조선인도 많고 원폭피해자 중에는 수만 명의 조선인이 포함되고 있다. 피폭한 채 조선반도로 돌아간 사람들은 원폭병의 차료를 못받은 채 방치되고 말았다. 또한 패전시의 가라후또(사할린-편집자 주)에는 일본인 30만 명 이외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이 4만 3천 명 있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쏘련과의 교섭에서 귀국할 수 있었으나 조선인은 그대로 남게 되고 쏘련과 한국의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고향과 연락도 하지 못하였다.

3) 여성동원

▲ 1944년 9월 3일에 촬영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영심씨의 실물사진 [사진 : 필자 제공]

여성에 대해서는 1944년에 여자정신대 근로령이 적용되고 군수공장 등에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이와는 다른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있다. 일본병사들이 의한 강간사건의 속출에 애먹은 일본군이 스스로 고안한 감리매춘제도로서 수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서 전쟁터로 끌려가고 가혹한 조건하에서 병사들의 상대를 강요당하였다. 방위청의 도서관 등에서 국가와 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사료가 많이 발굴되고 군의 계획에 따라 여성들을 모으고 전쟁터에 보낸 모습, 군대 내에 설치된 위안소의 실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 참모장의 1938년 6월의 통첩은 ≪강간에 대해서는 각지의 주민이 일제히 일어나고 죽음으로 보복하고 있으며 따라서 각지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강간은 단순한 형법상의 죄악에 머물지 않고 치안을 저해하고 군 전반의 작전행동을 저해하니 국가에 미치는 중대반역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엄중하게 취제하는 것과 동시에 ≪속히 성적 위안의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중국민중들의 강한 반한(원한에 반발-편집자 주)의 원인으로 된 일본병사들의 강간을 막아내는 것은 군의 작전계획에 있어서 사활적 문제로 되고 있었다. 위안부의 설치는 군사작전의 중요한 일환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의 업자들에게 담당시키는 것이 항상적으로 많은 위안부를 모으고 관리하는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신성≫한 ≪황군≫이 감리매춘의 당사자인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군이 스스로 전면에 나오는 것을 피하고 민간업자에 시키는 방법을 취한 것이었다. 군의 지령에 의해 업자가 일본내지에서 위안부를 모으고 있을 때 경찰이 부녀자유괴의 의심으로 조사를 한다는 일까지 있었다. 같은 국가기관인 경찰이라도 설마 ≪황군≫이 그러한 지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악질업자를 처벌하려고 한 것이다.

내무성 경보국장의 통첩은 ≪제국의 위신을 훼손하고 황군의 명예를 손상할 뿐만 아니라 총후(銃後)의 국민, 특히 출정병사 유가족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주게 되는 것과 동시에 부녀매매에 관한 국제조약의 취지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신중하게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민간의 업자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제국의 위신을 훼손하고 제국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이 직접적인 당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국민의 싸우는 사기에 관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간업자에게 시키는 방식을 취한 것은 ≪작전≫을 수행하는 데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국내에서 대대적으로 하기에는 거리끼고 따라서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으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그것도 당국이 ≪부인・아동의 매매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조약에 가입함에 있어서 적용제외를 선언하고 있었던 식민지에서 실시하였다. 조선에서의 징집이 식민지권력과 밀접하게 결부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종군≪위안부≫문제는 전쟁과 인권의 문제, 식민지지배와 민족의 문제, 여성의 지위와 존엄의 문제 등 넓은 시야에 선 어프로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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