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대단한 요령꾼이었다.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서는 나라 민족, 스승 선배, 동지 따위 막무가내로 짓밟고 넘어가는 철면피였다.

그는 일찍이 머리 잘 돌리는 체질이어서, 서양 선교사 밑에 들어가 영어도 배우고 출셋길도 열어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배제 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맛보고는, 그동안 선교사에게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불과 일 년 만에 모교의 영어 선생이 되었다.

 

1885년 서재필 선생이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사대 모화의 상징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민족자주의 상징 ‘독립문’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민중과의 소통 언로(言路)를 열기 위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최, 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은 약삭빠르게 이에 가담, 독립신문에 논설을 쓰기도 하고,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크게 성과를 거두기에 이른다.

당시 이승만이 가까이 모시고 따른 선교사들은, 자기들 모국인 식민지 침략제국주의 세력 확장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 인도, 오세아니아, 동남아 등, 구미 열강의 식민지 침략, 노예사냥 인신매매 등을 간접 지원하고, 이를 합리화 원활을 기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땅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들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이들은 한 손에 종교 경전을 들고, 약소국 침략, 살인 약탈, 노예사냥, 인신매매로 얼룩진 피 얼굴을 십자가로 가리우고, 자비와 인간 구원을 외쳐대는 양두구육의 사이비 종교인들이었다.

이 서양 선교사들이, 만약에 자기들의 모국과 중국 일본제국주의가 서로 경쟁 적대관계가 아니었다면, 조선인들의 반중 반일 독립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은 빤한 이치였다

 

이승만은 매우 운수가 좋은 사나이였다.

요령꾼이어서 시류(時流)에 약삭빠르고 기회를 잘 잡아, 서재필 선생의 민중 계몽, 독립사상 고취 운동에 편승, 일약 바닥 백성을 위한 민중 투사의 반열에 오른다.

수구파들의 모략과 이간질 배척에 의해, 서재필 선생이 추방을 당하자, ‘협성회보’ ‘매일신문’의 주필 자리에 오른다.

나중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한인학교와 한인교회에서 경영권 문제를 야기,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큰 물의를 이르켰다.

한인 1세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피 같은 독립운동자금에 사사로이 손을 대었던 것이다.

 

 그는 1919년 4월 상해(중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스스로 대통령 직함을 사용, 크게 문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만들어 불법적으로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주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이승만은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제약을 이야기시켰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일항쟁, 화급한 무장 독립투쟁에는 뜻이 없고 외교 제1주의, 외교로 독립을 얻어 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미국 중심의 강대국에 의한 위임통치안을 제출하기도 했었다.

이 황당무계한 이승만의 사대 매국 종속식민지 추종 노선은 임시정부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임시정부 의정원은 보다보다 못하고,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1922년 6월 이승만 불신임 결의안을 상정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 안하무인 격으로 과대망상증에 걸린 출세주의자가 되어, 대한민국 대표 대통령직을 사칭, 국제적인 외교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 지상주의, 미국의 힘에 의지한 외교 종속주의자 이승만은, 1925년 3월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고 제명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선 땅이 해방을 맞자, 이승만은 그해 10월 서둘러서 귀국, 독립촉성회를 조직, 지주 그룹인 한민당 세력, 서북 출신 기독교 세력과 손을 잡고, 권력을 잡기 위한 협잡질에 열을 올린다.

이승만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위 참가 거부, 반탁 반공 노선의 남선(南鮮) 만의 단독정부 즉각 설립을 주장했다.

민족자주역량을 발휘하여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좌우합작을 주장하고, 심지어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설립에까지 찬성을 표한, 보편적인 현실주의자 여운형 암살에 동의한 혐의가 있다. 이어서 세상이 다 아는 보수우익 민족주의자 애국적인 김구 선생 암살은 직접 관여 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미군정과 짜고 벌이는 정치놀음이었지만, 이승만은 이와같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반일 독립투쟁 동지도 선배 후배도 안중에 없었다.

독립운동 사회개혁 운동의 스승이고 대선배였던 서재필 선생에 대한 배신은, 가히 패륜적 배신 배반의 극치였다.

이 나라 근대화 독립, 자강 자립의 선구자였던 서재필 선생은, 가족이 몰살을 당하고 두 살짜리 아들은 종로 바닥에 던져져 굶어 죽는 참극을 겪었다.

나라에 끼친 공으로 보나, 이승만 자신이 입은 은혜로 보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어쩌면 서재필 선생이 되어야 했다.

 

이승만의 이런 제 버릇 개 못 주고, 민족분단 남선 단독정부의 권좌에 앉아, 전쟁주의자 북진 통일 맹신자가 되어, 6·25전쟁의 전범 제1호가 되었다.

그의 범죄 항목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미군의 남선 불법 강점에 반대하고, 친일파의 재등용에 항거하여 입산한, 순수 민족주의 청년인 야산대의 토벌학살, 4·3과 여순항쟁의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사건, 6·25전쟁 중 관제 빨갱이로 몰아 죽인 양민학살 범죄를 어찌할 것인가.

 

정치적 과오로는 첫째가 국토분단 수용, 친미 종속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단독정부 수립 찬성, 민족통일국가 건설의 훼방꾼이 되었다.

헌법을 짓밟고 의정을 무너뜨린 부산 사사오입정치 파동, 일방적인 북진 통일주장, 영구집권을 위한 야당탄압과 무자비한 정적 제거를 감행했다.

고리채와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정책에 의한 농촌 경제의 파탄, 빈익빈 부익부의 악성 자본주의 수탈정책,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사회기강을 모두 다 결단이 나 있었다.

 

자유당 제2인자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의 농간으로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이승만은, 결국 이 교활한 암 여우의 변태적 정치야욕에 의해, 운명의 날을 맞고야 만다.

우남 이승만의 ‘배필’ ‘리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3·15부정선거를 획책하고,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악몽은 종말을 고한다.

희대의 요령꾼, 국토분단의 하수인이자 두목인 이승만, 아무 죄도 없는 우리민족에게 79년 동안 양키 식민통치를 받게 한 원흉이었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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